전수현의 영계(靈界)(2021)에 대한 노트.

 

안대웅 큐레이터

 

<영계>는 10여 분 러닝타임동안 끊임없이 알쏭달쏭함을 밀어붙이는 듯하다. 시작 부분에 목소리로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다시는 재등장하지 않는 일본인-통일교-병원 종사자의 기괴한 조합은 시작에 불과하다. 무언가 작은 구멍이 부풀었다 꺼졌다하는 찢어졌다 붙었다 장면은 대체 무얼 찍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창문도 마찬가지다. 창문은 사실 찍기 힘든 대상도 아닌데 왜 곁눈질하면서 몰래 찍었달까? 시컴한 물 색 표면이 끈끈한 젤리처럼 흔들리며 빛의 하이라이트가 반짝인다. 한편 죽어가는 중환자를 보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전 중의 고전인 덩실덩실춤을 흥겹게 춘다. 폭죽이 터지고 레이저 몇 개가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른다. 정좌한 참어머님은 마네킹 같다. 

 

이 비디오는 청평수련원과 청심국제병원의 인상의 단편을 촬영한 것이지만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쇼트의 나열이다. 무언가 심각하게 결여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다시 보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먼저 고백하건대 지금 적고 있는 이야기는 파편적인 생각의 노트에 불과하다

 

시간을 다루는 비디오 작업을 보고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계>는 시간적인 작업이 아니라 공간적인 작업인 것 같다. 그래서 비디오가 끝났을 때, 러닝타임 전체가, 거기에 있는 모든 쇼트가 동시에 한꺼번에 제각각 쏟아지는 것 같았다. 쇼트 하나 하나가 모두 비정상적으로 자율적이다—말하자면, 객체적으로 작동한다. 비디오에는 소위 말하는 씬이나 시퀀스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쇼트는 주머니 속에서 뭔가 잘못 눌러서 찍힌 사진 같고 쇼트와 쇼트의 연결은 사다리 같은 랜덤 돌리기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말하자면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언가 불길한 느낌마저 든다. 제목도 <영계>다. 비디오 자체가 1990년대 <링>의 저주의 비디오 같은 정서를 풍긴다. 이걸 본 이상 너는 이미 감염되어 있다,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같은.

 

파고 들지 못하겠으니 제목에라도 기대야 한다. 여기서 통일교의 교리에 진지하게 접근해 볼 생각은 전혀 없고, 다만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영계는 사후세계에 해당하는, 통일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비디오는 영계를 다룰 수도 있고 비디오 자체가 영계일 수도 있다. 저주의 비디오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비디오 자체가 영계일 수 있다는 설이 더 흥미로울 것 같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한다. 다만 이 비디오가 죽음에 대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쇼트 하나 하나가 만약 죽음의 지문이라면, 오래된 필름과 대조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스탠 브래키지(Stan Brakgage)의 1959년작 <창문 물 아기 움직임(Window Water Baby Moving)>이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영계>는 브래키지의 <창문>과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뒤집어져 있다. 무엇보다 <창문>이 오래된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영계>는 디지털 파일로 된 비디오다. 그럼에도 <창문>이 컬러라면 <영계>는 흑백 처리 되었다. <창문>이 브래키지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담았다면 <영계>는 죽음의 문턱에 걸쳐 있는 사람을 담았다. 그런 의미에서 <창문>에서 물이 생명에 대한 여러 메타포를 제공한다면 <영계>의 물은 죽음과 불길함과 연결된다. <창문>이 탄생의 기쁨과 추악한 모습을 동시에 담았다면 <영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양가적 태도 같은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때때로 <창문>이 과도하게 섹슈얼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신생아와 병치한다면, <영계>는 평온한 중환자와 영성에 몰두한 신명난 사람들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창문>이 탄생을 통해 예술을 고찰했다면, <영계>는 이단 종교를 통해 예술을 그렇게 한다. 이 경우 창문이 향하는 대상은 <창문>에선 필름, <영계>에선 비디오일 테다.

 

여기서 <영계>가 그 위대한 브래키지의 계보를 잇는 것 같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다만 <영계>에는 오래된 실험영화의 취미가 여럿 묻어나는데, 그건 국적불명의 레트로 취미이며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차라리 동시대적 현상에 훨씬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그러니까 거칠게 던져놓자면, 오늘날 실험영화 스타일의 실험영화라고 불리는 비디오 작업이 진짜 실험영화와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영계>가 공간적으로, 그러니까 무시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자면 그런 취미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트로 취미는 서구 실험영화 스타일로 해소되지 않는 전혀 다른 요소까지 평면적으로 함께 끌어오는 것 같은데, 그것이 <영계>의 진짜 문제 같으며, 그게 무엇인지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 같다. 다음 과제로 남겨 둔다.

 

<창문>과 <영계>가 모두 자전적인 이야기란 사실만큼은 적어 두고 가고 싶다. 1959년 미국의 젊은 브래키지는 결혼도 하고 분만실에서 아기도 낳고 영화도 찍고 창조가 무엇인지도 물었다. 2021년 한국의 전수현은 통일교 청심병원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비디오를 찍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창문>이 창세기고 <영계>가 묵시록이라면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Cookies

Cookies are used on this website to improve the usability and to offer the best experience. Click "Accept all" to allow the usage of all cookies. Click "Reject all" to not allow any cookies (cookies needed for basic operation of the website excluded). You can also choose cookies individually and only allow those selected by clicking the "Accept" button.

Shows videos from https://www.youtube.com. Also see https://policies.google.com/privacy.
Shows videos from https://www.vimeo.com. Also see https://vimeo.com/privacy.